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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세계일보
작성일 2018-09-11 (화) 09:50
IP: 211.xxx.45
군불 땔감으로 아궁이서 사라질 뻔 했던 보물 '겸재화첩'



 
군불 땔감으로 아궁이서 사라질 뻔 했던 보물 '겸재화첩'  


“… 사랑채 한쪽에 붙은 변소엘 가다 보니까 머슴이 군불을 때고 있는데 무슨 문서 뭉치를 마구 아궁이에 처넣고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문득 들여다보니 초록색 비단으로 귀중하게 꾸민 책이 하나가 눈에 띄었어요.

아마 무식한 머슴이 군불 땔감으로 휴지며 뭉치를 안고 나올 때 잘못 섞여 나온 거겠지요.

나는 반사적으로 그 책을 보자고 했지요. 그리고 펼쳐보니 겸재 정선의 화첩이란 말이에요.

내가 그 시각에 변소엘 가지 않았거나 한 발짝만 늦었어도 그 화첩은 아궁이 속으로 불타서 영원히 사라졌을 테지요.”

- 정선의 ‘해악전신첩’에실린 ‘단발령망금강’(斷髮嶺望金剛). 친일파 송병준의 집에서 불쏘시개가 될 뻔했던 해악전신첩의 사연은 일제강점기 문화재에 대한 우리의 인식 수준을 실감케 한다 -

골동상 장형수가 1933년에 친일파 송병준의 집에서 겪은 일이다. 장형수는 겸재화첩을 송병준의 손자에게서 사서 전형필의 서화 수집창구 역할을 하던 한남서림의 이순황에게 보여 주었고 이순황은 전형필이 수장하도록 중개했다.

겸재화첩은 현재 간송미술관에 전하고 있는 보물 제1949호 ‘해악전신첩’(海岳傳神帖)이다. 이 일화는 친일파들이 얼마나 부유했고 또 많은 미술품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근대기에 소중한 미술품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고 문화재에 대한 인식도 부족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근대의 화가이자 미술평론가인 김용준(1904∼1967)의 개탄에서도 비슷한 시대상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신사조에 대한 갈망은 날이 갈수록 높아져서…가가호호 전래의 진귀한 책과 기이한 보배는 휴지값, 개값으로 팔아 치우고 하는가 하면”이라며 새로운 것에의 관심이 커질수록 과거의 것들을 돌보지 않게 된 세태를 꼬집었다.

옛 유물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현실에서 자신의 재산을 기울여 우리 문화재를 모은 수장가들을 높이 평가하여야 마땅하다. 이들이야말로 민족문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다만 수집을 시작할 때의 의도와 달리 어렵게 수집한 유물이 흩어지거나 없어지는 운명에 처한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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