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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 주 성
작성일 2017-11-29 (수)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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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의 공덕비문
 
충무공 이순신
 
이순신
[ 李舜臣 ]
우리나라가 2백 년 동안이나 태평을 누린 탓에 백성들이 병란을 알지 못하다가 총을 쏘고 칼을 멘 왜적들이 갑작스레 동남쪽으로 쳐들어오니, 서울ㆍ개성(開城)ㆍ평양(平壤)을 모조리 빼앗기고 일곱 도(道)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때 도원수(都元帥) 권율이 서울 근처에서왜적들을 노려 큰 도적을 잡았고,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공이 바다에서 활약하여 큰공을 세웠다. 그러니 이
두 분이 아니었더라면 명(明)나라의 육군과 해군이 무엇을 믿고 힘을썼을 것이며, 종묘사직의 무궁한 국운(國運)이 어디에 힘입어 다시 이어졌겠는가? 그런데 도원수의 무덤에는 큰 비석이 세워졌건만, 통제사의 무덤에는 아직도 사적(事蹟)을 기록한 비문이 없으니, 이 어찌 사대부들에게 남은 유감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번에 충무공의 외손(外孫)인 홍우기(洪宇紀)군이 판서<이식>이 지은 공의 시장(諡狀)을 내게 보이며 비문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그런데 나는 80세에 가까운 몸이라 붓과 벼루를 멀리 하였으니, 공의 기개와 공훈을 참으로 만분의 일도 감히 형용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공의 깨끗한 충성과 큰 절개를 내가 마음 속으로 우러러 사모하였던 것은 어릴
적부터였으니, 어찌 감히 뜬 말로 거짓 사양하여 그 즐겨 말하고 싶어하던 바를 다하지 않
을 수가 있겠는가? 이에 감히 사양하지 아니하고 서술하는 바이다.
공은 덕수 이씨(德水李氏)로 휘(諱)는 순신(舜臣)이고, 자(字)는 여해(汝諧)이다.

 세종조(世宗朝)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정정공(貞靖公) 이변 )의 5대손으로 가정(嘉靖) 을사년(乙巳年,1545년 인종 원년)에 태어났다. 어렸을 적부터 영특하여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서 아이들과 함께 놀 때에는 진(陣) 치는 시늉을 하면서 놀아 대장으로 높임을 받았으므로 사람들이 몹시 기특하게 여겼고, 장성해서는 활 쏘는 재주가
남보다 뛰어났다.
만력(萬曆) 병자년(丙子年, 1576년 선조 9년)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는데, 무경(武經) 가운데≪황석공서(黃石公書)≫를 강할 적에 시관(試官)이 묻기를, “장양(張良)이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노닐었다고 했는데, 과연 죽지 아니한 것인가?” 하니, 공이 답하기를, “한(漢)나라 혜제(帝) 6년에 유후(留侯) 장양이 죽었다는 내용이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 적혀 있으니, 어찌 신선을 따라가 죽지 않았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러자 시관들이 서로 돌아보면서 감탄하기를, “이것이 어찌 무인(武人)이 능히 알 수 있는 것이겠는가!” 하였다.
상공(相公) 서애(西厓) <유성룡>은 공과 젊어서부터 좋아하던 사이라 매번 재지(才智)가 대장감이라고 칭찬하였는데,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이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있을 적에 서애를 통하여 공을 만나 보기를 청했으나, 공은 만나려고 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같은 문중 사람이니 만나 보아도 괜찮겠지만, 인사권을 가진 자리에 있으니, 만나 보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또 공이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로 있을 적에 병조 판서(兵曹判書) 김귀영(金貴榮)에게서녀(庶女)가 있어서 공을 맞이하여 사위로 삼으려고 하였는데, 공은 말하기를, “내가 이제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섰는데, 어찌

세도가(勢道家)에 발을 붙이겠는가?” 하고, 그 자리에서 중매쟁이를 쫓아 버렸다.
공은 변장(邊將)이 되거나 군관(軍官)이 되었을 적에 한 가지도 사욕(私欲)을 채우는 일이 없었으며, 상관이라도 잘못하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철저히 말하여 바로잡았는데, 비록 미움을받을망정 꺼리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건원보 권관(乾原堡權管)으로 있을 때 오랑캐 적 울기내[鬱只乃]가 오랫동안 변방의 걱정거리가 되었는데, 공이

울기내를 유인하여 포박해 왔다. 그러자 병사(兵使) 김우서(金禹瑞)가 그 공로를 시기하여 군사를 제멋대로 부렸다고 장계(狀啓)하고 상을 주지 않았다.
공이 건원보에 있는 동안에 부친의 상을 당하여 분상(奔喪)하고 왔으며, 삼년상을

마치고 곧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가 되었다가 겨우 보름만에 다시 조산 만호(造山萬戶)에 제수되었다.
순찰사(巡察使) 정언신 이 녹둔도(鹿屯島)에 둔전(屯田)을 개설하고 공을 시켜 겸하여 관할하게 하였는데, 공은 둔전의 군사가 적다고 하면서 여러 차례 수자리 군사를 더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병사 이일 이 허락하지 않았다. 가을이 되어 과연 오랑캐들이 대거 침입해 오므로, 공은 힘써 싸워 이들을 막아내고 그 괴수를 쏘아 죽인 뒤, 그대로 추격하여 사로잡힌 둔전 군사 60여 명을 빼앗아 돌아왔다.

그런데도 병사는 공을 죽여 자신의 잘못을 모면하려고하여, 장차 영문(營門)에서
공의 목을 베려고 하였는데, 군관(軍官) 선거이(宣居怡)가 공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술을 권하며 진정시킬 적에 공은 정색하며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
이 모두 천명에 달린 것이거늘 술을 마셔서 무엇하겠는가?” 하고는, 뜰 안으로 들어가 항변하면서 조금도 굴복하지 아니하였다. 그러자 병사도 기운이 꺾여 공을 가두고서 계문(啓聞)하였다.

임금은 공에게 죄가 없음을 살피고 죄를 인 채 종군(從軍)하게 하였다가 얼마 뒤에 다시오랑캐의 목을 바친 공로로 용서하였다.
기축년(己丑年, 1589년 선조 22년)에 선전관(宣傳官)으로서 정읍 현감(井邑縣監)에 제수되었다.

경인년(庚寅年, 1590년 선조 23년)에는 서애가 힘써 조정에 천거하여 고산리 첨사(高山里僉使)로 승진되었고, 얼마 있다가 자급이 올라 만포 첨사(滿浦僉使)가 되었는데, 대관(臺官)들이 너무 빨리 승진되었다고 하여 개정되었다. 신묘년(辛卯年, 1591년 선조 24년)에 진도 군수(珍島郡守)와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으며, 다시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에 발탁되었다.
이때 왜놈들과 흔단이 다시 벌어졌으므로, 공이 이것을 깊이걱정하여 날마다 방비할 병기를 수리하고 거북선을 처음으로 만들었는데, 판자로 덮고 못을꽂았으며, 군사를 감추고 대포를 설치해 마침내 이에 힘입어 승전을 거둘 수가 있었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에 왜적이 부산(釜山)과 동래(東萊)를 함락시키고 거침없이 몰아쳐 왔다. 공은 군사를 이동시켜 왜적들을 치려고 하였는데, 부하들이 모두 전라도의 진(鎭)을 떠나는 것을 어렵게 여기자 공이 말하기를, “오늘날 우리들이 할 일은 오직 왜적을 치다가 죽는 일뿐이다.” 하고, 여러 곳의 군사를 합하여 떠나려고 하였다.
그때 마침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이 사람을 보내 구원을 요청해 왔다. 공은 군사를 이끌고 옥포(玉浦)로 나가 만호(萬戶)이운룡 과 우치적(禹致績) 등을 선봉으로 삼아 먼저 왜선(倭船) 30척을 깨뜨렸다. 고성(固城)에 이르러 서울이 함락되고 대가(大駕)가 서울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는 서쪽을 향하여 통곡한 다음 군사를 이끌고 다시 본영(本營)으로 돌아왔다.
원균이 또 구원을 요청하므로 공은 다시 노량(露梁)으로 달려가 왜선 13척을 깨뜨리고 사천(泗川)까지 추격하여 싸웠다. 그때 공은 어깨에 탄환을 맞았는데도 오히려 활을 놓지 않고 종일토록 싸움을 독려하였으므로, 총에 맞은 줄을 아무도 몰랐다.
6월에 또 당포(唐浦)에서 싸웠다. 왜적들이 그림을 그린 누선(樓船)을 타고 왔는데, 편전(片箭)을 쏘아 금관(金冠)을 쓰고 금포(錦袍)를 입은 괴수를 죽였으며 나머지 적들을 다 무찔렀다.
정오에 적선(賊船)이 또다시 대거 쳐들어오므로, 공은 빼앗은 왜선을 앞세워 가다가 왜적과의거리가 한 마장쯤 되는 곳에서 불을 질렀다. 그러자 화약이 폭발하고 불꽃이 치솟으면서 벼락치는 듯한 소리가 나니, 적들이 크게 패하여 달아났다.

전라 우수사 이억기(李億祺) 역시 달려와 모여 고성(固城)에서 합세하여 싸워 또 누선에 타고 있던 괴수를 죽이고 30여 척을 깨뜨렸다.
그러자 왜적들이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으므로 드디어 이억기와 함께 본영으로 돌아왔다.
왜적들이 또 호남(湖南)으로 향하였으므로 공이 또 고성으로 나아갔다. 적선이 바다를 뒤덮고 몰려왔는데, 공은 거짓으로 퇴각하는 척하면서 왜적들을 꾀어 낸 다음 한산도(閑山島)에 이르러서 70여 척을 깨뜨렸다. 그러자 왜적의 괴수 평수가(平秀家)가 몸을 빼어 달아났으며, 죽은자가 거의 1만여 명이나 되었으므로 왜병들이 놀라 떨었다.

공은 진중에 있으면서 밤낮으로 계엄하여 일찍이 갑옷을 벗고서 누운 적이 없었다.
어느 날밤에 달빛이 몹시 밝았는데, 공이 갑자기 일어나 술 한잔을 마시고는 모든 장수들을 불러 말하기를, “왜적들은 간사한 모략이 많으니, 달이 없을 때야 당연히 우리를 습격해 오겠지만, 달이 밝을 때에도 습격해 올 것이므로, 이에 대해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였다.
그리고는 드디어 호각을 불어 모든 배로 하여금 닻을 올리게 하였다. 그러자 얼마 있다가 척후선(斥候船)에서 왜적들이 쳐들어온다고 보고하였는데, 지는 달이 서산에 걸렸을 즈음에 어둠 속으로 오는 적선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지라, 중군(中軍)이 대포를 쏘고 고함을 지르자 여러 배에서 모두 호응하니, 왜적들은 우리측에서 방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마침내 감히 침범하지 못하고 물러갔으므로 장수들은 다들 공을 신묘하다고 여겼다.

공이 부산을 들이쳐서 왜적들의 근거지를 엎어 버리려고 하였는데, 왜적들이 목책(木柵)을 치고 높은 산으로 올라갔으므로, 마침내 빈 배 1백여 척을 불지르고 돌아왔다. 공이 잇달아 승첩(勝捷)을 아뢰니, 임금은 이를 가상히 여겨 정헌 대부(正憲大夫)로 자급을 올리고 교서(敎書)를 내려 표창하였다. 공이 한산도로 진을 옮겨 전라도와 경상도 두 도를 제압하게 하기를 청하자, 조정에서 허락하고 마침내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의 제도를 두어 공으로 하여금 겸하여 거느리게 하니, 통영(統營)의 설치가 이로부터 시작되게 되었다.

공이 별도로 5백 석의 쌀을 모아 봉해 두자, 어떤 사람이 무엇에 쓸 것인가를 물으므로 공이대답하기를, “지금 임금이 의주(義州)에 계신데, 만일 요동(遼東)으로 건너가게 된다면, 배를가지고 가서 임금을 모시고 와 나라의 회복을 꾀하는 것이 나의 직책이다. 이것은 그때 임금이 드실 양식으로 쓸 것이다.” 하였는 바 생각의 원대한 것이 대개 이와 같았다.

원균은 성품이 본디 급하고 질투심이 많았으며, 또 스스로 선배라 하여 공의 아래에 있기를 부끄럽게 여겨서 지휘를 따르지 않았는데, 공은 입을 다문 채 그의 장단(長短)에 대해 말하지않았으며, 도리어 자신에게 허물을 돌려 체차해 주기를 요청하니, 조정에서는 원균을 충청 병사(忠淸兵使)로 삼았다. 그러자 원균은 조정의 대신들과 사귀어 온갖 방법으로 공을 모함하였다.
 
이때 적장(賊將) 소서행장(小西行長)과 가등청정(加藤淸正)이 거짓으로 서로 싸우는 듯한형상을 짓고서, 요시라(要時羅)를 간첩으로 파견하여 먼저 가등청정을 치도록 하였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그 말을 곧이 듣고 공에게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라고 재촉하였는데, 공은 왜적들의 간사한 술책을 알아채고는 편의대로 하려고 하면서 난색을 보이자, 간관이 ‘출정하지 않고 머뭇거렸다’고 탄핵하였다.
정유년(丁酉年, 1597년 선조 30년) 2월에 공을 옥에 가두자, 체찰사(體察使) 이원익이 치계(馳啓)하기를, “왜적들이 꺼리는 바는 주사(舟師, 수군(水軍))이니 이순신(李舜臣)을 체차해서는 안되고, 원균을 파견해서도 안 된다.” 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따르지 않았다.

이에 이원익이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나라 일을 이제는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되었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들에게 의논하도록 명하니, 판중추부사정탁이 아뢰기를, “군기(軍機)는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어서 이순신이 나아가지 않은 데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뒷날에 다시 한번공을 세울 수 있게 하소서.” 하였다.
그러자 마침내 백의종군(白衣從軍)하라고 명하였다. 이때모부인(母夫人)이 아산(牙山)에서 졸(卒)하였는데, 공이 울부짖으면서 말하기를, “나라에 충성을 다했건만 죄가 이미 이르렀고, 어버이에게 효도하려 하였건만 이미 돌아가시고 말았구나”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였다.
공이 진영에 있을 적에 운주당(運籌堂)을 짓고 모든 장수들과 함께 거기에서 군사(軍事)를 논의하였는데, 원균이 공을 대신하게 되어서는 공이 하던 일을 모두 변경하여 그 집에 첩을 두고 울타리로 둘러막았다. 이에 여러 장수들이 그의 얼굴을 보기가 어렵게 되었으며, 원균은술 마시기만을 일삼아 군사들의 마음을 크게 잃어버리고 말았다. 요시라가 와서 말하기를,“가등청정의 후원 군사가 나오고 있으니, 그것을 막아 쳐야 한다.” 하니, 조정에서는 또 나아가서 싸우라고 독촉하였다. 이에 7월에 원균이 전군(全軍)을 거느리고 나갔는데, 왜적들이 야음을 틈타 엄습하여 원균의 군사가 모두 무너져 달아나다가 죽고, 군함 100여 척도 모두 한산도에서 침몰하고 말았다.

이에 왜적들이 호남 바다로부터 상륙하여 남원(南原)을 함락시키니,조정에서는 마침내 공을 상중(喪中)에 기용하여 통제사(統制使)로 삼았다.
공은 10여 기(騎)를 거느리고 순천(順天)으로 달려가서 남은 배 10여 척을 얻고 흩어진 군사 수백 명을 모아 어란도(於蘭島)에서 적을 깨뜨렸다. 이때 조정에서는 수군이 약하다는 이유로 공에게 육지에서 싸울 것을 명하였다. 그러자 공은 말하기를, “왜적들이 곧바로 충청도와 전라도로 쳐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수군이 그 길목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선(戰船)이 비록 적다고 할지라도 신이 죽지 않은 이상 왜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호남의 피란선(避亂船)들 가운데 여러 섬에 흩어져 정박해 있는 것이 1백 여 척이었는데, 공은 그들과 약속하여 진을 친 후방에 그 배들을 늘어 세워 응원하게 한 다음 공의 배 십여 척으로 앞에 나아가 벽파정(碧波亭)에서 왜적들을 맞아 싸우려 하자, 왜적선 수백 척이 와서 덮치는지라 공은 조금도 동요하지 아니하고 진을 정돈하여 왜적들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대포와 활을 한꺼번에 쏘았으며 군사들도 모두 죽기로 싸웠다. 그러자 왜적들이 크게 패하여 달아났는데, 왜적 가운데 명장(名將)인 마다시(馬多時)의 목을 베어 군사들의 위엄이 크게 떨쳤다. 승첩을 아뢰자 임금이 숭품(崇品)의 자급을 내려 상을 주려고 하였는데, 말하는 자들이 이미 지위와 녹봉이 높다는 이유로 저지하였다.

이때 명나라의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서울에 있다가 글을 보내어 치하하기를,
“근래에 이런 승첩은 없었습니다. 내가 직접 가서 괘홍(掛紅)하고자 하나, 길이 멀어서 가지 못합니다.” 하고는, 백금과 붉은 비단을 보내어 표창하였는데, ‘괘홍’이란 것은 중국 사람들이 폐백(幣帛)으로써 서로 축하하는 예식이다.
무술년(戊戌年, 1598년 선조 31년) 봄에 진을 고금도(古今島)로 옮겼다. 공은 비록 상중에 기용되어 군문(軍門)에 종사하기는 하였으나 날마다 겨우 몇 홉의 밥만 먹은 탓에 얼굴이 몹시 여위었다. 그러자 임금이 특별히 사신을 보내어 권도(權道)를 따르라고 명하였다.
이해 가을에 명나라 도독(都督) 진린(陳璘)이 수병(水兵) 5천을 거느리고 와서 자못 우리 백성들을 침탈하며 소요를 일으키므로 이에 공이 군중에 영을 내려 막사를 뜯게 하니, 도독이 황급히 달려와서 그 이유를 묻는지라 공이 답하기를, “우리 군사와 백성들은 귀국에서 군사들이 나온다는 말을 듣고 마치 부모를 기다리는 듯한 심정이었는데, 정작 와서는 약탈만을 일삼으므로 모두들 도망칠 것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난들 어찌 혼자 남아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진린이 공의 손을 잡고 말렸다. 공이 다시 말하기를, “귀국 군사들이 나를 속국(屬國)의 신하라고 하여 조금도 꺼리지 않고 있는데, 만일 편의에 따라 금지시킬 권한을 준다면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진린이 허락하였다. 이때부터는 온 섬 안이 편안해졌다.
편장(褊將) 宋汝悰)이 명나라의 배와 함께 왜적들을 쳐서 70명의 목을 베었는데, 명나라 군사들은 한 명도 베지 못하자 진린이 부끄러워하면서 성을 내므로, 공이 위로하기를, “대인이 와서 우리 군사들을 통솔하고 있으니, 우리 군사들의 승첩이 곧 귀국 군사의 승첩입니다. 그런데 어찌 감히 내가 그 공을 차지하겠습니까? 얻은 바를 모두 바치겠습니다.” 하니, 진린이 몹시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일찍이 공의 명성을 들었는데, 이제 보니 과연 그렇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송여종이 실망하여 하소연하니,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썩은 대가리가 무엇이아까운가? 네 공은 내가 다 장계(狀啓)로 아뢸 것이다.” 하니, 송여종도 승복하였다.
진린은 공이 군사를 다스리고 계책을 세우는 것을 보고는 탄복해 말하기를, “공은 실로 작은 나라의 인물이 아니다. 만일 중국으로 들어가면 당연히 천하의 대장이 될 것이다.” 하고, 임금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이 통제사는 천지를 주무르는 재주와 나라를 바로잡은 공이 있다.”고까지 하였는데, 이는 대개 진심으로 탄복해서 한 말이었다. 그리고는 드디어 명나라에 아뢰니, 황제 또한 가상하게 여겨 공에게 도독인(都督印)을 내렸는데, 이 도장은 지금 통제영(統制營)에 보관되어 있다.
9월에 명나라 제독 유정(劉綎)이 중국의 묘병1)(苗兵)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예교(曳橋) 북쪽에 진을 치고서, 10월에 수군과 함께 왜적을 협공하기로 약속하였다. 공이 도독과 함께 나아가 싸우던 중에 첨사(僉使) 황세득(黃世得)이 탄환에 맞아 죽었는데, 황세득은 공의 처종형(妻從兄)이었다. 이에 여러 장수들이 들어와 조상하니, 공은 말하기를, “황세득이 나라 일에 죽었으니, 그 죽음은 영광스러운 것이다.” 하였다.
소서행장(少西行長)이 도독에게 뇌물을 보내어 퇴각해 주기를 요청하니, 도독이 공을 퇴각시키려고 하였다. 그러자 공이 말하기를, “대장이란 화친을 말해서는 안 되는 법이고, 원수인 왜적들을 놓아 보낼 수 없습니다.” 하니, 도독이 부끄러워하였다. 소서행장이 사람을 보내어 말하를, “조선 군사는 마땅히 명나라 군사와 따로 진을 쳐야 할 것인데, 지금 같은 곳에 함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내 땅에 진을 치는 것은 내 뜻대로 하는 일로, 적병이 알 바가 아니다.” 하였다.
소서행장이 곤양(昆陽)과 사천(泗川)에 있는 왜적들과 더불어 횃불을 들어 서로 신호하므로, 공은 군사를 단속하여 대기하였다. 남해(南海)의 적이 노량(露梁)에 와서 정박해 있는 자가 무수히 많았는데, 공이 도독 진린과 함께 밤 2경(更)에 출발하면서 하늘에 빌기를, “이 왜적들을무찌른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하자, 문득 큰 별이 바다 속으로 떨어지니, 이를 본 사람들이 모두 놀라면서 이상하게 여겼다.
4경에 왜적을 만나 큰 전투가 벌어졌는데, 아침에 이르러서 크게 깨뜨리고 적선 2백여 척을 불질렀다. 이어 남해(南海) 지경까지 추격하여 직접 화살과 포탄을 무릅쓰고 싸움을 독려하던 중에 날아드는 탄환에 맞았다. 좌우에서 공을 부축하여 장막 안으로 들어가자, 공이 말하기를, “싸움이 한창 급하니 부디 내가 죽었다고 말하지 말라.” 하였다. 말을 마치자마자 숨지니, 향년(享年) 54세였다.

공의 조카 이완(李莞)이 공의 말대로 배 위에 서서 기를 휘두르며 싸움을 독려하기를 공과 같이 하였다. 왜적들이 진 도독의 배를 에워싸서 몹시 위급하게 되었는데, 여러 장수들이 대장선에서 깃발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는 모두 달려가 구원해 내었다. 한낮이 되어서야 왜적이 크게 패하여 먼바다 밖으로 도망쳤다. 도독이 배를 돌려 가까이 대고는 말하기를, “통제공(統制公)은 어서 나오시오.” 하고 부르자, 이완이 울면서 대답하기를, “숙부님은 돌아가셨습니다.” 하니, 도독이 뛰어 일어나 배 위에서 세 번이나 넘어지다가 말하기를, “죽은 뒤에도 능히 나를 구원해 주었다.” 하면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으며, 두 진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바다를 진동하였다.

영구를 아산(牙山)으로 돌려 올 적에는 모든 백성들과 선비들이 울부짖으면서 제사를 올렸는데, 천 리 길에 끊어지지 않았다. 임금은 즉시 제관(祭官)을 보내어 조상(弔喪)하고 우의정(右議政)을 증직하였다. 갑진년(甲辰年, 1604년 선조 37년)에 1등 공신에 이름을 올려 효충 장의적의 협력 선무 공신(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의 호를 내리고, 좌의정(左議政)에 추증하였으며, 덕풍 부원군(德豊府院君)에 봉하고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내렸다. 좌수영(左水營) 근처에사당을 세워 충민사(忠愍祠)라 사액(賜額)하였으며, 호남 사람들은 수영의 동쪽 산마루에 비석을 세워 슬피 사모하는 뜻을 표하였다. 기해년(己亥年, 1599년 선조 32년) 2월에 아산의 빙항(氷項) 선영이 있는 곳에 장사지냈다.

공은 담력과 도량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고, 뜻과 지조가 단단하고 확고하였다. 몸가짐이 법도 있는 학자와 같이 스스로 검속하였고, 효도와 우애는 천성적으로 타고났으며, 집안에서의행실이 돈독하였다. 일찍 죽은 두 형의 자식들을 자기 소생처럼 길렀는데, 일용(日用)의 물품과 혼사(婚事)의 예절까지도 반드시 조카를 먼저하고 자기 자식은 뒤로 하였다.
혹 죄 없이 옥에 갇혔을 적에도 죽고 사는 것으로 인해 마음이 동요되지 않았다.
공은 수양한 바가 근본이 있었으므로 지혜와 계책을 내면 한 가지도 빠짐이 없었고, 적의 정세를 헤아리기를 귀신과 같이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승리를 거두어 호서와 호남 수천 리땅을 온전하게 보전하고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근본이 되게 하였다.
바다를 가로질러 쳐들어오는 왜적의 형세를 꺾은 것은 (당(唐)나라의) 장순(張巡)이나 허원(許遠)과 같고, 몸소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은 뒤에 그만둔 것은 (촉한(蜀漢)의) 제갈 무후(諸葛武侯)와도 같다. 그러나 나라 일에 죽은 것은 이들과 같을지라도, 큰 공을 거둔 이는 오직 공 한분 뿐이다. 그러니 이른바 ‘세 사람과는 다르다’2)고 한 말이 맞는가, 틀리는가? 그 공은 온 나라를 뒤덮었고 이름은 천하에 들렸으니,

아! 위대하기도 하다.

공이 일찍이 지은 시가 있으니 그 시에 이르기를, “바다에 맹세함에 어룡이 동하고, 산에 맹세함에 초목이 아는도다[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 하였는데, 이 시를 외우는 자들 가운데 눈물을 지으면서 격동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 이정(李貞)은 순충 적덕 병의 보조 공신(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 겸 영경연사(領經筵事) 덕연 부원군(德淵府院君)에 추증되었다. 할아버지 이백록(李百祿)은 선교랑(宣敎郞) 평시서 봉사(平市署奉事)를 지냈는데, 가선 대부(嘉善大夫) 호조 참판(戶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증조 이거(李琚)는 통정 대부(通政大夫) 병조 참의(兵曹參議)이다. 어머니는 정경 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된 초계 변씨(草溪卞氏)이다.

공은 보성 군수(寶城郡守) 방진(方震)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현감(縣監) 이회(李薈)이고, 차남은 정랑(正郞) 이예(李)이다. 3남은 이면(李葂)으로 공이 자신과 가장 많이 닮았다고 하여 몹시 사랑하였는데,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에 바닷가로 어머니를 모시고 피란하던 중 왜적을 만나 혼자 싸우다가 죽으니, 나이가 17세였다. 딸은 사인(士人) 홍비(洪棐)에게 시집갔다.
이회는 2남 1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참봉 이지백(李之白)이고, 차남은 이지석(李之晳)이며, 딸은 윤헌징(尹獻徵)에게 시집갔다. 이예는 자식이 없어서 이지석을 후사로 삼았다. 홍비는 4남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홍우태(洪宇泰)이고, 차남은 현감 홍우기(洪宇紀)로 나에게 이 비명(碑銘)을 지어 달라고 청한 사람이다. 3남은 홍우형(洪宇逈)이고, 4남은 홍진하(洪振夏)이며, 딸은 윤수경(尹守慶)에게 시집갔다.
이지백은 겨우 9품의 벼슬 밖에 하지 못했고, 또 아들이 없어서 이지석의 맏아들 이광윤(李光胤)을 후사로 삼았다. 이지석은 두 번 장가들어서 6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공의 후사가 어찌하여 이처럼 번성하지 못한단 말인가? 이는 반드시 뒷날에 크게 되려는 것일진저,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지난 옛날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 바로 그해에 바다에는 고래 같은 파도 일어나 하늘 향해 화살을 쏜 예(羿, 옛날 활을 잘 쏘던 자)와 같았네. 북해(北海)쯤은 뛰어넘을 수 있다 하며 다리를 놓은 듯이 배를 띄워서 그 기세 요계(遼薊)까지 넘보았다네. 세 도읍지 이미 모두 유린되었고 일곱 도가 모두 불에 타 버렸는데, 그 누가 옷소매를 떨치었는가? 공이 떨치고 일어나서 이가 부서지도록 갈며 죽기로써 스스로 맹세하였네. 온교(溫嶠)처럼 눈물을 흩뿌렸고3) 사추(士稚)처럼 뱃전을 두드렸네.4) 직분이 통제사였는데, 왜적들이 간첩 놓아 이간질함에 다른 장수(將帥, 원균을 가리킴) 이미 내려왔으니 무슨 죄 있어 구금시켰는가? 착하신 임금이 은혜 내리고 어진 재상 안 된다고 말을 올려서 패한 뒤에 장수 자리 이어받았네. 펄럭이는 깃발 새로 빛을 발하고 기율(紀律)이 엄숙한데다 군사들의 마음 더욱 예리해졌네. 벽파정(碧波亭) 싸움에서 승리 거두어 위엄과 명성 더욱 떨치자 굳세었던 적 갑자기 나약해졌네. 달아나는 도적들 마음 급해서 문득 동쪽 바다 바라보며 도망쳐 돌아갈 맘 이미 생겼네. 적을 어
찌 놓아 줄 수가 있으랴? 우리 군사 용기 더욱 백배하여 나라를 회복할 형세 있었네. 개선가 를 울리려고 하는 그때에 유성(流星)이 빛을 내어 떨어지더니 공께서 그만 돌아가셨네. 양의(楊儀)가 남은 군사 정돈하자 중달(仲達)이 이미 도망치는 것과 같았는데5) 만인(萬人)이 하나같이 눈물 뿌렸네. 슬픈 기운 봉영6)(蓬瀛)에 진동하고 흘린 눈물 푸른 바다 넘쳐흐르니 그 명성 먼 후대에까지 전하리. 붉은 명정 바람에 펄럭이는데 사민들은 마치 부모 잃은 듯하여 상여 오는 천리 길에 제사 지냈네. 공은 높고 지위는 극에 달하여 화상을 기린각(麒麟閣)에 걸렸으니 공은 떠나가신 것이 아니네. 죽음을 슬퍼하는 예의 융숭해 기련산(祁連山)을 본떠서 무덤 만들어7) 종시토록 은혜를 보존하였네. 충민(忠愍)이란 사당이 세워져 임금이 내린 편액(扁額) 글씨 기운찬데 봄 가을로 제사를 올리는도다.

평생토록 우러러 사모하였건마는 황천 가는 길 이미 막혀 있으니 두 눈에 흐른 눈물 어찌 마르랴. 문장 짓는 솜씨 비록 거칠긴 해도 부끄러움 없는 유도(有道) 비문 같으니 양과 돼지 묶어 둘 수는 있으리.
8)각주
• 1) 묘병(苗兵) : 중국의 사천성(四川省)과 운남성(雲南省) 일대에서 모집한 군사를 말한다.
• 2) 앞에서 말한 장순이나 허원, 제갈량과는 다르다는 뜻임. 공자(孔子)가 제자들에게 각자의 뜻을 물었을 때, 자로(子路)ㆍ염유(冉有)ㆍ공서화(公西華)가 각자 자신들의 뜻을 말하였는데, 공자가 증석(曾晳)에게 물으니, 증석이 자신의 뜻은 세 사람과 다르다고 하면서 “동자들과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오겠다.” 하니, 공자가 증석을 허여하였다.
• 3) 진(晉)나라 성제(成帝) 때 소준(蘇峻)이 반란을 일으키자, 온교(溫嶠)가 표기장군(驃騎將軍)이 되어 그를 평정하였는데, 눈물을 뿌리면서 배에 올라 갖은 고생을 다
한 끝에 마침내 난리를 평정하였다. 죽은 뒤에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받았음.
• 4) 사추는 진(晉)나라 조적(祖逖)의 자(字)임. 조적이 예주 자사(豫州刺史)로 있을 적에, 난리를 만나 군사를 거느리고 북벌(北伐)을 하기 위해 강을 건너면서 돛대를 두
드리며 맹세하기를, “중원 땅을 맑게 하지 못한다면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 하였음.
• 5) 양의(楊儀)는 촉한(蜀漢) 때의 장수이고 중달은 위(魏)나라 장수 사마의(司馬懿)의 자(字)이다. 제갈 공명(諸葛孔明)이 죽으면서 양의에게 뒷일을 부탁하여 그대로 행하였더니 사마 중달이 제갈 공명이 살아 있는 것으로 여기고 도망을 쳤던 일.
• 6) 봉영(蓬瀛) : 발해(渤海)의 바다 가운데 있다고 하는 신선의 거처인 봉래산(蓬萊
山)과 영주산(瀛洲山)인데, 여기서는 남해 바다를 가리킴.
• 7) 기련산은 흉노족들이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청해(靑海)에 있는 산인 천산(天山)
을 일컫는 말이다.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곽거병(霍去病)이 기련산 주위에 있는
흉노족들을 정벌하기 위하여 여섯 차례나 출정하여 큰 공을 세웠는데, 그가 죽은 뒤
에 그의 무덤 위 봉분을 기련산 모양으로 만들어 그의 공적을 기렸다고 함.
• 8) 비문을 새긴다는 뜻이다. ≪예기(禮記)≫ 제의(祭儀)에 “제물로 바칠 짐승을 끌고 사당 안으로 들어가서 빗돌에 묶는다.” 하였는데, 이에 대해 서현(徐玄)은 설명하기를, “옛날에 종묘(宗廟)에 비석을 세운 것은 본디 짐승을 묶어 두기 위해서 세운 것 이었는데, 후세에 거기에 공덕을 기록하기 위하여 비문을 쓰는 풍속이 생겼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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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육(金堉 1580-1658)은 효종조에 영의정을 지낸 사회개혁가로 광해군 시절에 등국하였으나 곧은 성격 때문에 바른말을 마다하지 않아 면직되어 경기도 가평에서 농사를 자작하며 학문에 열중하였던 관계로 명성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는 소를 몰고 쟁기로 밭을 갈때면 밭의 양 끝 머리에 책을 펼쳐놓고는 오며 가며 한장씩 넘겨 보았다고 한다.
 
인조반정 후 다시 과거에 급제하여 등국하였는데 남들은 한번만 가라해도 죽을 고생을 해야하기에 꺼리는 중국행을 자진하여 48세, 57세 때 두번이나 다녀 왔다. 그는 청나라에서 서양의 신학문을 보고 와서 이를 보급하려 노력하였다.
 
그 당시 시장은 물물거래를 하여 불편하였기 상평통보(엽전) 보급으로 상거래를 활성화시키고, 길을 만들어 우마차로 짐을 나르도록 권하여지만 계으른 백성들과 김육을 시기하는 대신들이 길을 닦아 놓으년 외침시에  방어가 어렵다고 반대 하였다.
대동법을 시행하여 만민 평등원칙으로 나가려 하였다. 
그러자 양반들의 기득권보전을 위한 거센 반발에 고전을 하였지먼 전라도와 충청도에서는 성공 하여 백성들이 공덕비까지 세웠다. 
 더욱이 병자호란으로 온 나라가 황폐화하였고 해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는 데도 효종은 북벌만 꿈꾸고 있어 이를 말리는데 무척 애를 먹었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도 곧은 성격 때문에 주위로 부터 시기와 모함으로 여러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었는데 김육의 이순신 장군 비명에 당시 조정과 사회의 분위기를 그리고 지원군인 명나라 병사의 관계를 잘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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